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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를 넘어야 ‘고지’에 이른다.
임도건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10/16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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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문예일보 칼럼니스트=임도건]2년 마다 건강검진을 받고 결과를 기다릴 때면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괜스레 숙연하고 겸손해진다. 합격자 발표만큼 떨린다. 검진의가 엄포를 준다. “선생님, 건강관리 잘하셔야 합니다. 이제 기껏해야 50년 이상 살기 힘듭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도하니 완전 “갑분싸”다.

젊어 깨닫지 못했던 삶의 애착과 덧없음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생리학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데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아홉”고개다. 서른아홉에서 마흔, 마흔 아홉에서 쉰, 쉰아홉에서 예순으로 넘어가는 고비마다 중대한 변화를 경험한다. 두 가지 변화가 두드러진다. 노안과 걸음걸이 속도다.

첫째, 돋보기를 쓰면서 깨달은 게 있다. 인생을 좀 더 멀리 보라는 거다. 둘째, 노화와 걷기 속도는 정확히 반비례한다. 30대 삶의 속도는 시속 30km였다. 60대가 되니 60km, 70대는 70km로 체감속도가 빨라진다. 세월은 빨리 흐르는데 걸음걸이는 그만큼 느려졌다. 나이 들수록 새벽잠이 없다. 유효기간이 짧을수록 하루하루가 애절하고 소중해지는 것이다.

‘아홉’고비는 많은 교훈을 준다. 작년에 아홉 고비를 넘으며 평생 처음 입원했다. 보름 간 병상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침대는 장수 돌침대가 아니라 병상 침대였다. 이제 보니 나는 늘 아팠다. 약골이란 뜻이 아니다. 이래봬도 한때 운동선수였다. 그런데 몸이 안 아프면 마음이 아팠고, 맘이 안 아플 땐 영혼이 아팠고, 영혼이 평온할 땐 병든 사회가 날 아프게 했다. 보통사람은 스트레스라 하고 지성인들은 고뇌라 부르지만, 나이든 사람은 사는 게 다 그렇다고 말한다. 

열심히 살았는데, 진짜로 ‘살아있음’을 느낀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꿈의 성취를 향해 ‘살아가는’ 건지, 불가역적인 세파에 ‘사라지는’ 것인지 분별없이 10년을 살았다. 하이데거(1889-1976)가 말했던 “던져진 존재”(Geworfenheit) 자체였다. 황혼기가 되니 그 ‘피투성의 존재’가 ‘기투성의 존재’로 바뀌었다. 사랑이 뭔지 모르고 사랑하던 철부지 청춘이 이제 사랑이 뭔지 알고 사랑하려니 인생과 사랑이 두려워진다. 이제야 깨달은 진리 하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면 인생도 그만큼 내게 되돌려준다. (If you love your life, the life love you back.)   
  
5년 전 작고한 구본형. 그의 책 [마지막 수업]의 한 구절이 가슴을 때린다. 
“내게 다시 젊음이 주어진다면 겨우 시키는 일만 하면서 늙지 않으리라. 아침에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도 천둥처럼 놀라리라. 깊은 곳에 숨은 나를 찾기 위해 신도 가끔 헤매신다. 때로는 신도 자신의 흔적을 들킬 때가 있어, 감춰진 나를 찾는 날 나도 신과 함께 기뻐하리라. 가장 위대한 질문은 이것.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일은 뭘까? 하늘에 묻고 세상에 묻고, 내 가슴에 물어, 마침내 그 길 찾으면 억지로 일하지 않을 자유를 평생 누릴 터인즉, 길이 보이거든 사자의 입 속으로 머리를 처넣듯 용감하게 돌진할 것이요, 터널 속 길이 안 보이면 조용히 주어진 일을 할뿐이다. 신이 어디에 놓든, 그곳이 바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삶의 위대함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않다. 무엇을 하든 그것에 사랑을 쏟을지니, 내 길을 찾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1000번의 헛수고에도 1001번의 용기로 맞서리니 그리하여 내 가슴의 땅 가장 단단한 곳에 기둥을 박아, 평생 쓰러지지 않을 집을 지으면, 지금 살아있음에 눈물로 순간순간 감사하리라. 이 설렘과 떨림이 고여 생이 된다. 낮에도 꿈꾸는 자는 詩처럼 살게 되나니 인생은 꿈으로 지어진 한편의 시.” 새삼 고인의 명복을 빈다.  

조선시대 시인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무도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속은 어찌 텅 비었는가? 저러고도 사계절 늘 푸르니 내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임산공학 연구원에 따르면 대나무의 한 마디가 자라는데 2년은 족히 걸린단다. 대나무가 풀인지 나무인지는 4백년 지났어도 여전히 결론내지 못했다. 부름켜가 없어 지름에 변화가 없고, 속은 텅 비었으며, 죽순은 한번 자라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풀’이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수십 년 세월동안 단단한 목질을 유지하기 때문에 나무라는 주장도 있다. 大‘풀'이라 하지 않은 걸 보면 대‘나무’가 맞는 모양이다.

대나무가 마디의 아픔을 통해 성장하듯, 우리의 육체와 정신도 앓으면서 성장한다. 모든 앓음은 고통을 수반한다. 앓지 않고 아름다워지는 길은 없다.
 
"앓음"과 "아름다움"은 어원이 같다. 발음까지 비슷하다. 삶의 모든 앓음이 아름다움을 위한 전주곡이라면 순적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고비를 넘어야 고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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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0/16 [08:57]  최종편집: ⓒ 아시아문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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